[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선창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맞은 백일홍

조명암·김해송·고운봉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02 11:52 수정 2020.09.14 01:00

 



우리나라 근현대사 유행가 모티브로 인용된 단어는 선창·항구·정거장·고향·사랑·이별·눈물 등이 많다. 1920년대 후반에 도입된 신민요, 1930년대에 도입된 유행가 등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의 한()을 머금은 노래가 많고, 해방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구문물의 도입과 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憧憬心) 등이 노랫말 가사와 가락에 걸쳐진다.

 

이러한 역사적인 궤적 위에 걸쳐진 <선창>노래가 세상에 나온 해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1년 차이던 1941년이다. 그 해 17, 일본은 미국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한다. 그들이 풍설(風說)하는 대동아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였다. 결국 이 만행으로 4년 뒤 일본제국주의는 패망(1945. 8. 15)하고 천황제의 문을 내리는 것을 포함하는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 시기 일본제국주의는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는 수많은 야만적 수탈행위, 그 이상의 참혹하고 구체적인 악행을 저질렀다. 그 피폐한 시대의 터널을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살아 견디어냈다. 아픔과 슬픔을 넘는 비탄, 그러한 궁핍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이별은 있었다. 이런 시기에 멀리 타관 땅을 떠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찾아간 부둣가에 찬비만 내린다. 연어처럼 되돌아 온 항구·선창,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차가운 비만 내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Ny-Laeo58Z0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은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울어 본다고 다시오랴 사나이의 첫 순정/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던 항구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고운봉의 선창, 가사 편집)

 

<선창> 노래 1절과 2절 사이에 중간대사가 절절하다. 노랫말에 다하지 못한 시대이념이 담겨있고, 사랑하는 연인간의 맺지 못할 정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당신을 못 잊어서 천리 길을 왔건만/ 당신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었구료/ 그 옛날 둘이서 꽃씨를 심으면서/ 사랑하는 마음하나 변치 말자고 맹세하고 다짐했던 당신이건만/ ~ 울려고 내가왔나...’노래를 부르다가 모가지에 울컥울컥 애국의 분노가 매달린다. 빼앗긴 나라, 내 땅에서 부르짖던 사랑하는 연인들 간의 서글픈 해후의 노래, <선창>이 그렇다.

 

이 노래는 해방과 6.25전쟁의 시대적 아픔과 함께 작사·작곡가의 이름이 바뀌는 질곡을 거친다. 원 작사·작곡은 조명암과 김해송인데, 고명기와 이복룡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고운봉은 가수 데뷔 2년차 신예였고, 노래는 빅히트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광복 후 조명암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직을 거쳤고, 김해송도 전쟁 중에 행방이 묘연하여 월북설, 납북설이 떠돌아 두 사람의 이름이 실린 작품은 한동안 사용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사·작곡가의 이름을 바꿔서 금지곡에서 제외되고 대중들 속에 인기노래로 회자된다. 이후 제6공화국 노태우정권시절 월북예술인에 대한 해금으로 원래 이름이 밝혀진다. 이 노래는 1960년 김화랑 연출의 영화 <울려고 내가 왔던가>의 주제곡이다.

 

김작사(반야월이 붙여준 칭찬 별명) 김병걸(1957~)<뽕짝은 아무나 하나>에서 이 노래 <선창> 사연을 적시했다. 노랫말 속의 첫사랑은 일본제국주의에게 빼앗긴 조국으로, 부두는 우리나라의 강산으로, 이슬 맺힌 백일홍은 내 나라에 살면서 남의 나라 백성인 조선 사람을 지칭한다고. 특히, 고운봉은 당시 연예계의 베스트드레스로서 형형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 화려한 와이셔츠 깃을 달고 무대에 선 멋쟁이였음을 서술했다. 사실 이 노래 가사는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하던 고운봉의 친 형 고명기가 피신생활을 하면서 적어 보낸 고향의 추억을 그린 서사란다. 조명암 작사설과 대칭되는 이 서술은 차차 알아 볼 숙제다.

 

당시 21세 본명 고명득. 고운봉은 1920년 예산에서 태어나 1937년 예산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태평레코드에 전속가수가 되어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일본에서 <국경의 부두>로 데뷔하였고, 1941<선창>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날린 뒤, <남강의 추억>, <홍등야곡>, <명동 블루스>, <백마야 가자>, <인생은 육십부터> 등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그는 친일성향 노래도 불렀으며,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즈··칼리소 등 미국대중음악을 공부하다가 귀국하여 <명동 블루스>를 발표하였다. 김정구·현인·남인수 등과 함께 우리대중가수 1세대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고운봉은 흘러간 옛 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리바이벌한 음반을 발표하여 가요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06월에는 예산 덕산온천에 <선창>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고운봉은 이날 <선창>을 눈물로 열창했으며, 매년 4월 덕산에서 고운봉 가요제가 열린다. 고운봉은 1950년대에 세기의 사랑으로 화제가 되었던 여배우 윤인자와 결혼을 했다. 슬프고 청순가련한 역을 주로 맡아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윤인자, 그러나 이들은 1970년대에 이혼을 하였고, 200181, 고운봉은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점의 시대이념과 사람들의 삶을 그 당시의 현재 막사발로 오롯하다.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전명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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