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한 그릇에 담아 놓지 말라 [국정일보 문이주 기자]

문이주 기자

작성 2020.06.29 11:46 수정 2020.06.30 00:20

문이주 기자 =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이란 유행가가 1945년 해방 후까지 유행하였다. 우리는 심심하면 곧잘 시대를 말하고 그 시대에 탄생한 영웅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하고 젊은 시절을 화재로 삼는 일이 있었다. 히틀러, 나폴레옹과 같은 대영웅, 대혁명가는 그들이 탄생할 만한 시대나 사회적 여건을 반드시 자기 주변을 수반하고 등장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도 대원군, 김옥균, 이승만 만 보아도 그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여건 같은 것이 있었고, 정계에서도 이따금 홍길동이 탄생하는 것처럼 경제계에도 혜성들이 나타난다.

근세 이후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돈바람은 1930년을 넘어서면서는 남·중부지방의 토지·무역바람에서 북부지방의 군항과 자원으로 옮겨간 추세였다. 따라서 혜성과 같은 사나이들은 거의 북선지방에서 속속 탄생했던 것이었다.

지금도 여러 가지 개발의 호재가 있으면 주변의 땅값은 크게 움직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항공촬영을 하고 정밀측량을 끝내고 모든 계획을 완전히 세워놓고 발표를 한다. 그리고 토지거래허가제 같은 규제로 부당한 땅값의 조작을 못하게 한다.

처음 경부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신갈, 용인, 수원, 신탄진 일대까지 서울의 토지 브로커들이 들락거리면서 20배까지 땅값을 조작하고 약사 빠른 재벌급 복부인들은 엄청난 땅을 사두어 폭리를 취했다.

김기덕은 대대로 농사를 짓는 집안 함북 부령에서 태어났다. 김기덕은 함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일본말도 배웠다.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 측량일을 배워 측량기사가 되었으며, 오사카로 가서 어느 간장 도매집에서 점원으로 일도 했다.

김기덕은 불과 4-5년 만에 푼푼히 월급을 저축해서 귀국하여 23세에 함북지방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려 우피와 곡물, 목재 등 한·러무역에 손을 댔다. 또 연해주의 청어가 많이 잡혀 청년 무역가로 성장했다.

당시 계속 오르기만 하던 러시아의 루불화돈 장사에 손을 댔다. 1916년경 유럽에서는 1차대전이 치열했다. 1917년에는 루불화가 더욱 폭락하여 두 달만 기다려 보겠다고 창고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뒀다.

김기덕이 쌓아둔 막대한 루불화는 그 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고 화폐개혁이 되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26세의 김기덕은 완전히 망해 버렸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중국 사람들은 무슨 물건이건 한 그릇에 담아 놓지 말라고 했다.

김기덕의 부인도 만약을 대비해서 엄청난 금붙이를 따로 모아 사업에 실패하여 재기불능인 남편에게 1만 냥의 돈을 주었다. 김기덕의 부동산 20만원 + 현금 1만원.

김기덕은 현금 1만원으로 괘종시계를 만들었다. 겉은 평범한 나무로 만들고 추를 순금으로 만들어 상경하여 총독부 국장을 만나 술을 잔뜩 얻어 마신 뒤, 그집 사모님에게 평범한 벽시계하나를 선물로 바쳤다.

그후 김기덕은 당시의 조선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50만원을 총독부 국장의 보증으로 조선은행에서 용자 받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루불화로 망했던 김기덕은 불과 5년도 못되어 보기 좋게 재기했다.

김기덕은 융자 받은 50만원 중에 상당량을 나진 앞 바다에 떠 있는 대초도와 소초도의 두 섬 120만 평을 송두리째 사두었는데, 나진이 항구로 개발 되면서 천만장자가 되었다.

19321126일자 동아일보는 버려진 섬두 개를 가지고 일약 천만장자로 일어선 도깨비 거부 김기덕으로 전해 주었다.

천만장자 김기덕은 청진에다 청덕학교를 세웠고, 또 중학교 과정의 청덕전기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자기 고향인 청진의 교육발전에 큰돈을 희사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한성실업학교를 인수해서 경영하기도 했다.

김기덕은 해방이 될 때가지 북선지방에서 손꼽힌 거부였지만 해방이 되고 나자 다시 맨주먹이 되고 말았다. 1953년 그가 월남하여 죽을 무렵에는 유산으로 자손에게 남겨준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의 세 아들은 남하하여 장남 김원갑은 서울 한성고 재단 이사장, 둘째 김부갑은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셋째 김경갑은 한국기계 간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삶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소중한 것이다. 선으로 이룬 것은 영원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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